얼마 전부터 만화 ‘마스터 키튼’을 사 모으고 있다. 한 권 한 권씩 포장비닐을 뜯어 읽고 나서 책장에 차곡차곡 꽂아 넣으니, 만화가 재미있는 건 물론이요, 일산에 이사 오면서 새로 산 책장 한 칸이 조금씩 채워져 나가는 걸 보는 재미도 만화 못지않게 쏠쏠하다. 우라사와 나오키가 그린 만화 가운데서는 ‘마스터 키튼’이 가장 마음에 드는데, 여러 개의 짤막한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잠깐 보고 금방 책을 덮을 수 있어서 좋고, ‘오버’하지 않으면서도 잔잔한 여운을 남기는 점이 무엇보다 좋다. 게다가 우라사와 나오키 특유의 둥글둥글하고 오버하지 않는, 설득력 있는 그림체가 그 내용과 잘 어울린다(만약 이 만화의 그림체가 수박만한 눈동자에 종이가 베일 것 같은 날카로운 콧날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순정만화 그림체였으면 이 만화는 부조리 그 자체가 되어 버렸을 거다).
‘마스터 키튼’ 3권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곧 폐교될 처지에 놓인 한 사회교육원의 마지막 강의의 마지막 시간, 강의를 맡은 주인공 키튼이 강의를 들으러 온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마지막으로 여러분께 당부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학교가 없어졌다 하더라도 계속 공부해 달라는 겁니다. 사실 저는 학문을 추구하는 사람으로서 자신감을 잃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여러분과 함께 지내던 중에 깨달았습니다. 공부할 정열이 있는 한…강의할 학교를 잃더라도 공부를 계속해 갈 겁니다.
인간은 왜 공부해야 하는 걸까요?
인간은 평생 계속해서 공부해야 합니다. 인간에게는 호기심, 아는 기쁨이 있습니다.
직책을 위하여나, 출세해서 장관이 되기 위해 공부하는 건 아닙니다.
그럼 왜 공부해야 할까요? …그게 인간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여느 때처럼 연수원 강의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독서실에 갈 채비를 마치고 잠깐 만화나 보자는 생각에 책을 집어든 거였는데, 이 대목에서 한참동안 책장을 넘기질 못했다. 인간은 왜 공부해야 할까? 나는 대체 왜 그놈의 ‘공부’를 하러 이리도 급히 낑낑대며 독서실에 가야 하는 것일까?
난 키튼이 마지막에 제시한 저 답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공부하는 게 무슨 인간의 ‘사명’인 건 아니다. 게다가 ‘왜 해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에 ‘그게 사명이니까’라고 대답해 봐야 그건 ‘해야만 하니까 해야만 한다’라고 순환논법으로 대답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보다는 ‘인간에게는 호기심, 아는 기쁨이 있다’라는 저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호기심, 아는 기쁨. 그것이야말로 저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닐까.
호기심이 얼마나 인간의 삶을 풍요롭고 활기 넘치게 하는지. 우리는 그걸 너무 잊고 산다.
사는 데가 바로 그 근처인지라 웨스턴돔 분수광장을 뻔질나게 왔다갔다 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늘 보게 되는 건 분수를 보며 깔깔대면서 분수에 뛰어들어 물놀이를 하는 어린아이들이다. 일산으로 이사 오기 전, 신림동에 살면서는 주변에 온통 고시생, 대학생뿐이었지 어린아이들을 볼 기회는 별로 없었다. 그에 비해 일산에는 엄마아빠 손잡고 나들이 나온 아이들이 많은데, 아이들은 분수광장을 그냥 지나치는 일이 없는 것 같다.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아이들은 대체 저 에너지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쉴새없이 뛰어다니고 숨 넘어갈 듯 깔깔대는데도 애들은 마냥 분수가 즐겁기만 하다. 보는 어른들이 먼저 지칠 지경이다. 내 친구는 언젠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애들은 어른들 에너지를 다 빨아먹는다’라고. 그렇다. 어른들은 애들 노는 거 쫓아다니는 것도 힘들다. 애들은 아무리 해도 안 지치고 어른들만 지쳐가니, 어떻게 보면 정말 아이들이 어른들 에너지를 빨아먹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그냥 어리니까, 더 젊으니까 에너지가 더 많은 걸까? 그렇지만 근력, 근지구력 어느 것 하나 아이들보다 어른들이 훨씬 더 센데?
어린아이들은 호기심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 아닐까. 주변에 온통 처음 보는 것들, 새로운 것들 뿐이니까, 신기한 것들을 보고 만지고 느끼고 하면서 매 순간 ‘아는 기쁨’을 느낄 수 있으니까 그런 것 아닐까.
나이를 먹으면서 우리는 신기한 게 점점 줄어든다. 어차피 어디선가 본 거고, 들어본 거고, 해본 거다. 매사에 신기할 게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 바로 냉소다. ‘피, 그까짓 것’, ‘원래 그런거야’, ‘당연히 그런거지’ 라고 내뱉는 경우가 늘어갈수록, 우리는 호기심을 버리고 그 자리에 냉소를 채워넣는다. 그리고 냉소가 늘어갈수록 우리 삶의 에너지는 사라진다. 매사에 시큰둥, 신기할 것도 없고 흥미로울 것도 없으니 굳이 몸을 움직여 보고 느끼고 하고 싶은 생각이 생기질 않는 것이다. 어느새 종일 침대에 누워만 있으면 딱 좋겠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렇게 종일 침대에 누워 있으면 휴식 덕에 에너지가 충전이 돼야 할 것 같은데, 신기하게도 누워 있을수록 더 기력이 빠지는 느낌이 든다.
냉소는 혼자 찾아오지 않는다. 녀석은 무기력을 데리고 온다.
2004년, 대학에서 양창수 교수님의 채권각론 강의를 들었다. 교수님께서 어느 날인가 '파인만씨, 농담도 잘하시네' 라는 책을 읽고 감상문을 써 오라는 숙제를 내셨다. 리처드 파인만이라는 미국의 천재(이자 괴짜) 물리학자가 스스로 자신의 삶에 대해 쓴 일종의 수필집이었다. 노벨상을 수상한 천재 물리학자. 그러나 브라질의 리오 카니발이 좋아서 매년 브라질을 찾는 사람, 거기서 북 치는 법을 배워가지고는 수준급 연주자가 되기도 하는 사람. ‘물리학을 가지고 노는’ 사람. 기인이라고 해도 좋을 법한 파인만의 삶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의 삶이 에너지로 가득차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는 정말 장난꾸러기 어린애 같았고 무엇보다 그는 호기심에 가득차 있었다. 그 책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몇 번이나 계속해서 등장하는 문구는 “그건 정말로 재미있는 일이었다!!”는 그의 감탄사다. 난 바로 그 어린아이 같은 호기심이 그의 삶의 원동력이었다고 생각한다. 파인만에게 세상은 신기한 것들로 북적대는, 매 순간 아는 기쁨을 주는 거대한 놀이터였을 것이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그런 건 몰라도 돼’라거나 ‘그런 건 필요없어’ 라는 말을 너무나 손쉽게 내뱉으면서 살고 있다. 그러면서 ‘알아야만 하는 것’을 알기 위해서,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만 몸을 억지로 억지로 움직인다. 그렇게 ‘알아야만 하는 것’만 간신히 알아두고, ‘필요한 것’을 꼭 필요한 만큼만 하면서 산다. 꼭 알야아만 하는 것만 알고 꼭 필요한 것만 하는데도 삶이 그렇게 지치고 힘들 수가 없다.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생각을 뒤집어 보자. 알아야만 하는 것만 알려고 하기 때문에, 필요한 것만 하려고 하기 때문에 삶이 지치고 활력이 없어지는 것 아닐까? ‘그런 건 몰라도 돼’라는 냉소적인 태도 뒤에 숨어 있는 것은, ‘알아야만 하는 것’과 ‘몰라도 되는 것’의 분류다. 그리고 그 분류의 기준은 저 멀리 어딘가에 놓여있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목표다. 대학입학시험을 잘 보기 위해서 ‘알아야만 하는 것’과 ‘몰라도 되는 것’, 사법시험에 합격하기 위해서 ‘알아야만 하는 것’과 ‘몰라도 되는 것’, 연수원을 우수한 성적으로 수료하기 위해서, ‘임관’을 하기 위해서 ‘알아야만 하는 것’과 ‘몰라도 되는 것’. 이렇게 미래의 목표를 기준으로 앎의 대상을 분류하는 순간, 그 앎의 대상 자체가 갖는 매력은 증발한다. ‘아는 기쁨’ 따위는 싹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현재, 지금 이 순간 내가 머리를 싸매고 하고 있는 ‘공부’는 한같 수단에 불과한 것이 되어 버린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행위가 수단으로 전락할 때, 아는 기쁨 대신 남는 것은 무기력과 억지로 이 순간을 버티며 핑계거리로 내세우는 ‘인내’뿐이다.
얼마 전, 38기 연수생들은 4학기 민사재판실무 시험을 치르고, 39기 연수생들은 민사재판실무 기록을 붙들고 씨름을 하던 날이었다. 친구 몇과 함께 독서실 세미나실에 모여앉아 되도 않는 주장 되는 주장 가리지 않고 대여섯 개나 항변(등)을 퍼부어 놓은 피고를 원망하며 끙끙거리다가, 잠시 쉬어 가기로 했다. 한 친구 녀석이 잠깐 밖에 나갔다 오더니만 뭔가를 들고 들어왔다. 들여다보니 38기 민사재판실무 수시평가 자료다. 어디서 났냐고 물었더니, 어떤 사람이 독서실 폐휴지함에 38기 민사재판실무 기록더미 전체를 버리고 갔더라는 것이었다.
그 38기 연수생분의 심정은 공감이 가고도 남는다. 4학기 마지막 시험이 끝났다는 안도감, 앞으로 지긋지긋한 저 기록더미를 보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감이 가득했을 것일 테다. 슬몃 부러움이 들기까지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찝찝한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 사람에게 그 민사재판실무 기록더미는 시험을 보기 위한 수단 그 이외엔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소리 아닌가. 그 이름 모를 연수생 분은 기록뭉치에 적혀 있는 깨알같은 글자들을 졸음을 참으며, 눈을 비비며 들여다보고 밑줄을 치고 별표를 그려넣으며 보냈던 그 많은 시간들이 시험을 본 날 이후로는 다 무의미한 것이 되어 버렸음을 자인한 꼴이 되어 버린 것 아닌가.
그렇게 쏟은 지나간 시간들이 시험을 본 다음 날 이후까지도, 나아가 영원히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쏟는 매 순간 순간을 미래의 무엇인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 순간 자체를 위해서 써야 한다. 그 자체가 즐거워야 한다. 물론 복잡하고 난해한 기록을 보면서 대체 뭐가 어떻게 즐거울 수 있냐고 당장에 반론이 들어오겠지만, 키튼의 말처럼 인간에게는 누구나 아는 기쁨이 있는 것이라면, 그리고 우리 모두가 어린 시절에는 무한한 호기심을 갖고 있었다는 걸 생각한다면, 새로 무엇인가를 알아가는 것은 그 앎의 대상이 분수의 물줄기가 되었든, 사법시험에서 나를 괴롭혔던 어음법이 되었든, 판결문 주문 쓰는 법이 되었든 복잡하기 짝이 없는 주택임대차보호법이 되었든 그 자체로 즐거운 일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냉소의 가장 나쁜 점은 그것이 삶에서 진지함을 앗아간다는 것이다. 눈앞에 펼쳐지는 현재의 상황을 시큰둥하게 바라보면 그 자연스런 결과로 그 현재의 상황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게 된다. ‘어떻게 되든 말든 내 알 바 아니다’라는 냉소적인 태도는 결국 현재에 온 힘을 다하지 않게 만든다. 온 힘을 다하지 않으면 진정한 성취감도 없고 진정한 아쉬움도 없다. 일이 잘 돼도 요행일 여지가 크니 진심으로 성취의 기쁨을 느끼지도 못하고, 못 돼도 언제나 변명거리가 남아있으니 진심으로 아쉬워하고 반성의 계기로 삼을 수도 없다. 무덤덤하고 그만큼 무기력한 삶의 연속일 뿐이다. 요즈음 팽배한 정치적 냉소주의 역시 이와 비슷한 결과를 불러오고 있다. 내가 찍질 않았으니 국회에 가서 앉아 있는 사람이 잘 해도 그건 어쩌다 그렇게 된 것 뿐이라서 정치적 성취감이 없고, 못 해도 그땐 ‘그럴 줄 알았다’고 말하며 책임을 회피할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냉소적 거리두기 탓에 비판과 개선의 노력은 자라날 틈이 없어진다.
호기심이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다’라는 눈(또는 ‘프레임’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라면, 냉소는 ‘모든 것이 당연하다’라는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다. 냉소로 가득찬 사람은 의문을 품지 않고, 주어진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만다.
대법원의 판례를 대하는 태도를 예로 들어 보자. 대법원의 견해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고, 그렇게 제기된 의문에 반론을 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의문을 제기한다는 사실 자체에 화를 내는 사람도 있고(난 이런 사람도 실제로 보았다), 의문을 제기하든 말든 별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도 있다.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호기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으니까, 대법원의 판례도 여러 가능한 해석론 가운데 하나일 뿐이니 틀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제기된 의문에 반론을 펴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호기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의문을 가질 줄 모르는 사람은 그에 대해 반대 견해를 피력할 수도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의문을 제기하는 데 대해 화를 내는 사람은, ‘왜?’라는 질문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긴 하지만, 그래도 마지막 네 번째 부류의 사람보다는 낫다. 화를 낸다는 건 최소한 판례의 태도에 대해 진지한 애정은 있다는 걸 보여 주기 때문이다. 아예 의문이 있든 말든 신경을 안 쓰는 사람, 즉 냉소적인 사람은 그 최소한의 진지함마저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세 번째 부류의 사람에게 건전한 비판을 통해 발전으로 나아갈 가능성은 존재하지만, 네 번째 부류의 냉소적인 사람에게는 그 가능성마저도 없다. 냉소는 무비판적 수용을 부르고, 무비판적 수용이 유행할 때에는 어떠한 발전도 없다. 만연한 냉소는 결국 영구적 답보상태만을 낳을 뿐이다.
그러고 보면 연수원의 교육과정이 호기심을 자극하는 데는 좀 부족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시험과 평가, 그리고 그에 따른 성적부여라는 너무나도 중요하고 가시적인 미래의 목표가 놓여있는 탓에 아무리 애를 써도 현재의 시간은 그를 위한 수단이 되어 버리고 마는 구조적인 문제야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해야 한다’에서 벗어나서 ‘왜 그런가’ 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와 같은 질문을 던져 볼 기회 자체가 별로 주어지지 않는 것은 못내 아쉽다(검찰 사례연구에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해 보라’고, 직접적으로 호기심에 문을 열어 준 과제가 나왔을 때 얼마나 반갑던지!).
다시 ‘마스터 키튼’ 이야기를 하자면, 한 권 한 권 읽으면 읽을수록 이 만화는 ‘아는 기쁨’이 주는 생명력과 삶의 활기를 잘 보여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삶의 의미를 잃고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에게 키튼은 ‘저는 아직 알고 싶은 게 많습니다. 그래서 죽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가 하면, 살인을 결심한 어느 학생은 동급생인 키튼이 학교 벽에서 화석을 발견하고 눈을 빛내며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는 그 광경에서 감화를 받아 살인을 포기한다. 어쩌면 현재를 아직 오지 않은, 영원히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미래에 담보잡히지 않고 현재 그 자체로서 충만하게 살아갈 수 있게끔 하는 가장 훌륭한 원동력이 바로 호기심이 아닐까.
거울을 바라보고 서서 스스로를 들여다보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냉소란 녀석이 마음 한켠을 잠식해 들어와서는 어느새 그 그림자를 크게 드리우고 있었다.
마음 속에 들어와 앉은 냉소를 털어버려야겠다.
그러면 그 녀석과 함께 스리슬쩍 찾아와 자리잡고 앉아 있던 무기력도 함께 나갈 것이다.
빈 자리는 호기심으로 채우자.
그러면 ‘아는 기쁨’이 덩달아 찾아들 것이다. 틀림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