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하급관리가 오랫동안 선생의 학문을 청강하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학문은 매우 좋기는 하지만 공문서를 관리하고 소송을 관장하는 일이 번잡하여 학문을 할 수 없습니다'. 선생께서 그것을 듣고 말씀하셨다:


내가 언제 그대에게 공문서를 관리하고 소송을 관장하는 일을 떠나 허공에 매달려 강학하라고 가르친 적이 있는가? 그대에게는 이미 소송을 판결하는 일이 주어져 있으니, 그 소송을 판결하는 일에서부터 학문을 해야만 비로소 진정한 격물이다. 예를 들어 하나의 소송을 심문할 경우에 상대방의 응답이 형편없다고 화를 내서는 안 되며, 그의 말이 매끄럽다고 기뻐해서도 안 된다. 윗사람에게 부탁한 것을 미워하여 자기 뜻을 보태서 그를 다스려서도 안 되며, 그의 간청으로 인해 자신의 뜻을 굽혀서도 안 된다. 자기 사무가 번잡하다고 멋대로 대충 판결해서도 안 되며, 주변 사람이 비방한다고 모해한다고 그들의 의견에 따라 처리해서도 안 된다. 이 수많은 생각들은 모두 사사로운 것이며 단지 그대만이 스스로 알고 있으니, 반드시 세심하게 성찰하고 극복하여 오직 이 마음에 털끝만큼의 치움침과 기울어짐이라도 있어서 사람의 시비를 왜곡시킬까 두려워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격물치지이다. 공문서를 관리하고 소송을 관장하는 일들은 실학이 아닌 것이 없다. 만약 사물을 떠나 학문을 한다면 도리어 공허한 데 집착하는 것이다.


([전습록] 권하 218조목, 정인재/한정길 역에 따름) 




김형석 교수님 블로그에서 보고 퍼 왔다.

올해부터 새로운 출발이다. 새 출발에 대한 각오는, 위에 인용한 글로 갈음한다.

얼마 전부터 만화 ‘마스터 키튼’을 사 모으고 있다. 한 권 한 권씩 포장비닐을 뜯어 읽고 나서 책장에 차곡차곡 꽂아 넣으니, 만화가 재미있는 건 물론이요, 일산에 이사 오면서 새로 산 책장 한 칸이 조금씩 채워져 나가는 걸 보는 재미도 만화 못지않게 쏠쏠하다. 우라사와 나오키가 그린 만화 가운데서는 ‘마스터 키튼’이 가장 마음에 드는데, 여러 개의 짤막한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잠깐 보고 금방 책을 덮을 수 있어서 좋고, ‘오버’하지 않으면서도 잔잔한 여운을 남기는 점이 무엇보다 좋다. 게다가 우라사와 나오키 특유의 둥글둥글하고 오버하지 않는, 설득력 있는 그림체가 그 내용과 잘 어울린다(만약 이 만화의 그림체가 수박만한 눈동자에 종이가 베일 것 같은 날카로운 콧날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순정만화 그림체였으면 이 만화는 부조리 그 자체가 되어 버렸을 거다).

‘마스터 키튼’ 3권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곧 폐교될 처지에 놓인 한 사회교육원의 마지막 강의의 마지막 시간, 강의를 맡은 주인공 키튼이 강의를 들으러 온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마지막으로 여러분께 당부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학교가 없어졌다 하더라도 계속 공부해 달라는 겁니다. 사실 저는 학문을 추구하는 사람으로서 자신감을 잃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여러분과 함께 지내던 중에 깨달았습니다. 공부할 정열이 있는 한…강의할 학교를 잃더라도 공부를 계속해 갈 겁니다.

인간은 왜 공부해야 하는 걸까요?
인간은 평생 계속해서 공부해야 합니다. 인간에게는 호기심, 아는 기쁨이 있습니다.
직책을 위하여나, 출세해서 장관이 되기 위해 공부하는 건 아닙니다.
그럼 왜 공부해야 할까요? …그게 인간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여느 때처럼 연수원 강의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독서실에 갈 채비를 마치고 잠깐 만화나 보자는 생각에 책을 집어든 거였는데, 이 대목에서 한참동안 책장을 넘기질 못했다. 인간은 왜 공부해야 할까? 나는 대체 왜 그놈의 ‘공부’를 하러 이리도 급히 낑낑대며 독서실에 가야 하는 것일까?

난 키튼이 마지막에 제시한 저 답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공부하는 게 무슨 인간의 ‘사명’인 건 아니다. 게다가 ‘왜 해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에 ‘그게 사명이니까’라고 대답해 봐야 그건 ‘해야만 하니까 해야만 한다’라고 순환논법으로 대답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보다는 ‘인간에게는 호기심, 아는 기쁨이 있다’라는 저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호기심, 아는 기쁨. 그것이야말로 저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닐까.

호기심이 얼마나 인간의 삶을 풍요롭고 활기 넘치게 하는지. 우리는 그걸 너무 잊고 산다.

사는 데가 바로 그 근처인지라 웨스턴돔 분수광장을 뻔질나게 왔다갔다 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늘 보게 되는 건 분수를 보며 깔깔대면서 분수에 뛰어들어 물놀이를 하는 어린아이들이다. 일산으로 이사 오기 전, 신림동에 살면서는 주변에 온통 고시생, 대학생뿐이었지 어린아이들을 볼 기회는 별로 없었다. 그에 비해 일산에는 엄마아빠 손잡고 나들이 나온 아이들이 많은데, 아이들은 분수광장을 그냥 지나치는 일이 없는 것 같다.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아이들은 대체 저 에너지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쉴새없이 뛰어다니고 숨 넘어갈 듯 깔깔대는데도 애들은 마냥 분수가 즐겁기만 하다. 보는 어른들이 먼저 지칠 지경이다. 내 친구는 언젠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애들은 어른들 에너지를 다 빨아먹는다’라고. 그렇다. 어른들은 애들 노는 거 쫓아다니는 것도 힘들다. 애들은 아무리 해도 안 지치고 어른들만 지쳐가니, 어떻게 보면 정말 아이들이 어른들 에너지를 빨아먹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그냥 어리니까, 더 젊으니까 에너지가 더 많은 걸까? 그렇지만 근력, 근지구력 어느 것 하나 아이들보다 어른들이 훨씬 더 센데?

어린아이들은 호기심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 아닐까. 주변에 온통 처음 보는 것들, 새로운 것들 뿐이니까, 신기한 것들을 보고 만지고 느끼고 하면서 매 순간 ‘아는 기쁨’을 느낄 수 있으니까 그런 것 아닐까.

나이를 먹으면서 우리는 신기한 게 점점 줄어든다. 어차피 어디선가 본 거고, 들어본 거고, 해본 거다. 매사에 신기할 게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 바로 냉소다. ‘피, 그까짓 것’, ‘원래 그런거야’, ‘당연히 그런거지’ 라고 내뱉는 경우가 늘어갈수록, 우리는 호기심을 버리고 그 자리에 냉소를 채워넣는다. 그리고 냉소가 늘어갈수록 우리 삶의 에너지는 사라진다. 매사에 시큰둥, 신기할 것도 없고 흥미로울 것도 없으니 굳이 몸을 움직여 보고 느끼고 하고 싶은 생각이 생기질 않는 것이다. 어느새 종일 침대에 누워만 있으면 딱 좋겠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렇게 종일 침대에 누워 있으면 휴식 덕에 에너지가 충전이 돼야 할 것 같은데, 신기하게도 누워 있을수록 더 기력이 빠지는 느낌이 든다.
냉소는 혼자 찾아오지 않는다. 녀석은 무기력을 데리고 온다.

2004년, 대학에서 양창수 교수님의 채권각론 강의를 들었다. 교수님께서 어느 날인가 '파인만씨, 농담도 잘하시네' 라는 책을 읽고 감상문을 써 오라는 숙제를 내셨다. 리처드 파인만이라는 미국의 천재(이자 괴짜) 물리학자가 스스로 자신의 삶에 대해 쓴 일종의 수필집이었다. 노벨상을 수상한 천재 물리학자. 그러나 브라질의 리오 카니발이 좋아서 매년 브라질을 찾는 사람, 거기서 북 치는 법을 배워가지고는 수준급 연주자가 되기도 하는 사람. ‘물리학을 가지고 노는’ 사람. 기인이라고 해도 좋을 법한 파인만의 삶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의 삶이 에너지로 가득차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는 정말 장난꾸러기 어린애 같았고 무엇보다 그는 호기심에 가득차 있었다. 그 책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몇 번이나 계속해서 등장하는 문구는 “그건 정말로 재미있는 일이었다!!”는 그의 감탄사다. 난 바로 그 어린아이 같은 호기심이 그의 삶의 원동력이었다고 생각한다. 파인만에게 세상은 신기한 것들로 북적대는, 매 순간 아는 기쁨을 주는 거대한 놀이터였을 것이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그런 건 몰라도 돼’라거나 ‘그런 건 필요없어’ 라는 말을 너무나 손쉽게 내뱉으면서 살고 있다. 그러면서 ‘알아야만 하는 것’을 알기 위해서,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만 몸을 억지로 억지로 움직인다. 그렇게 ‘알아야만 하는 것’만 간신히 알아두고, ‘필요한 것’을 꼭 필요한 만큼만 하면서 산다. 꼭 알야아만 하는 것만 알고 꼭 필요한 것만 하는데도 삶이 그렇게 지치고 힘들 수가 없다.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생각을 뒤집어 보자. 알아야만 하는 것만 알려고 하기 때문에, 필요한 것만 하려고 하기 때문에 삶이 지치고 활력이 없어지는 것 아닐까? ‘그런 건 몰라도 돼’라는 냉소적인 태도 뒤에 숨어 있는 것은, ‘알아야만 하는 것’과 ‘몰라도 되는 것’의 분류다. 그리고 그 분류의 기준은 저 멀리 어딘가에 놓여있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목표다. 대학입학시험을 잘 보기 위해서 ‘알아야만 하는 것’과 ‘몰라도 되는 것’, 사법시험에 합격하기 위해서 ‘알아야만 하는 것’과 ‘몰라도 되는 것’, 연수원을 우수한 성적으로 수료하기 위해서, ‘임관’을 하기 위해서 ‘알아야만 하는 것’과 ‘몰라도 되는 것’. 이렇게 미래의 목표를 기준으로 앎의 대상을 분류하는 순간, 그 앎의 대상 자체가 갖는 매력은 증발한다. ‘아는 기쁨’ 따위는 싹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현재, 지금 이 순간 내가 머리를 싸매고 하고 있는 ‘공부’는 한같 수단에 불과한 것이 되어 버린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행위가 수단으로 전락할 때, 아는 기쁨 대신 남는 것은 무기력과 억지로 이 순간을 버티며 핑계거리로 내세우는 ‘인내’뿐이다.

얼마 전, 38기 연수생들은 4학기 민사재판실무 시험을 치르고, 39기 연수생들은 민사재판실무 기록을 붙들고 씨름을 하던 날이었다. 친구 몇과 함께 독서실 세미나실에 모여앉아 되도 않는 주장 되는 주장 가리지 않고 대여섯 개나 항변(등)을 퍼부어 놓은 피고를 원망하며 끙끙거리다가, 잠시 쉬어 가기로 했다. 한 친구 녀석이 잠깐 밖에 나갔다 오더니만 뭔가를 들고 들어왔다. 들여다보니 38기 민사재판실무 수시평가 자료다. 어디서 났냐고 물었더니, 어떤 사람이 독서실 폐휴지함에 38기 민사재판실무 기록더미 전체를 버리고 갔더라는 것이었다.

그 38기 연수생분의 심정은 공감이 가고도 남는다. 4학기 마지막 시험이 끝났다는 안도감, 앞으로 지긋지긋한 저 기록더미를 보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감이 가득했을 것일 테다. 슬몃 부러움이 들기까지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찝찝한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 사람에게 그 민사재판실무 기록더미는 시험을 보기 위한 수단 그 이외엔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소리 아닌가. 그 이름 모를 연수생 분은 기록뭉치에 적혀 있는 깨알같은 글자들을 졸음을 참으며, 눈을 비비며 들여다보고 밑줄을 치고 별표를 그려넣으며 보냈던 그 많은 시간들이 시험을 본 날 이후로는 다 무의미한 것이 되어 버렸음을 자인한 꼴이 되어 버린 것 아닌가.

그렇게 쏟은 지나간 시간들이 시험을 본 다음 날 이후까지도, 나아가 영원히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쏟는 매 순간 순간을 미래의 무엇인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 순간 자체를 위해서 써야 한다. 그 자체가 즐거워야 한다. 물론 복잡하고 난해한 기록을 보면서 대체 뭐가 어떻게 즐거울 수 있냐고 당장에 반론이 들어오겠지만, 키튼의 말처럼 인간에게는 누구나 아는 기쁨이 있는 것이라면, 그리고 우리 모두가 어린 시절에는 무한한 호기심을 갖고 있었다는 걸 생각한다면, 새로 무엇인가를 알아가는 것은 그 앎의 대상이 분수의 물줄기가 되었든, 사법시험에서 나를 괴롭혔던 어음법이 되었든, 판결문 주문 쓰는 법이 되었든 복잡하기 짝이 없는 주택임대차보호법이 되었든 그 자체로 즐거운 일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냉소의 가장 나쁜 점은 그것이 삶에서 진지함을 앗아간다는 것이다. 눈앞에 펼쳐지는 현재의 상황을 시큰둥하게 바라보면 그 자연스런 결과로 그 현재의 상황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게 된다. ‘어떻게 되든 말든 내 알 바 아니다’라는 냉소적인 태도는 결국 현재에 온 힘을 다하지 않게 만든다. 온 힘을 다하지 않으면 진정한 성취감도 없고 진정한 아쉬움도 없다. 일이 잘 돼도 요행일 여지가 크니 진심으로 성취의 기쁨을 느끼지도 못하고, 못 돼도 언제나 변명거리가 남아있으니 진심으로 아쉬워하고 반성의 계기로 삼을 수도 없다. 무덤덤하고 그만큼 무기력한 삶의 연속일 뿐이다. 요즈음 팽배한 정치적 냉소주의 역시 이와 비슷한 결과를 불러오고 있다. 내가 찍질 않았으니 국회에 가서 앉아 있는 사람이 잘 해도 그건 어쩌다 그렇게 된 것 뿐이라서 정치적 성취감이 없고, 못 해도 그땐 ‘그럴 줄 알았다’고 말하며 책임을 회피할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냉소적 거리두기 탓에 비판과 개선의 노력은 자라날 틈이 없어진다.

호기심이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다’라는 눈(또는 ‘프레임’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라면, 냉소는 ‘모든 것이 당연하다’라는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다. 냉소로 가득찬 사람은 의문을 품지 않고, 주어진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만다.

대법원의 판례를 대하는 태도를 예로 들어 보자. 대법원의 견해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고, 그렇게 제기된 의문에 반론을 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의문을 제기한다는 사실 자체에 화를 내는 사람도 있고(난 이런 사람도 실제로 보았다), 의문을 제기하든 말든 별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도 있다.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호기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으니까, 대법원의 판례도 여러 가능한 해석론 가운데 하나일 뿐이니 틀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제기된 의문에 반론을 펴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호기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의문을 가질 줄 모르는 사람은 그에 대해 반대 견해를 피력할 수도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의문을 제기하는 데 대해 화를 내는 사람은, ‘왜?’라는 질문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긴 하지만, 그래도 마지막 네 번째 부류의 사람보다는 낫다. 화를 낸다는 건 최소한 판례의 태도에 대해 진지한 애정은 있다는 걸 보여 주기 때문이다. 아예 의문이 있든 말든 신경을 안 쓰는 사람, 즉 냉소적인 사람은 그 최소한의 진지함마저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세 번째 부류의 사람에게 건전한 비판을 통해 발전으로 나아갈 가능성은 존재하지만, 네 번째 부류의 냉소적인 사람에게는 그 가능성마저도 없다. 냉소는 무비판적 수용을 부르고, 무비판적 수용이 유행할 때에는 어떠한 발전도 없다. 만연한 냉소는 결국 영구적 답보상태만을 낳을 뿐이다.

그러고 보면 연수원의 교육과정이 호기심을 자극하는 데는 좀 부족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시험과 평가, 그리고 그에 따른 성적부여라는 너무나도 중요하고 가시적인 미래의 목표가 놓여있는 탓에 아무리 애를 써도 현재의 시간은 그를 위한 수단이 되어 버리고 마는 구조적인 문제야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해야 한다’에서 벗어나서 ‘왜 그런가’ 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와 같은 질문을 던져 볼 기회 자체가 별로 주어지지 않는 것은 못내 아쉽다(검찰 사례연구에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해 보라’고, 직접적으로 호기심에 문을 열어 준 과제가 나왔을 때 얼마나 반갑던지!).

다시 ‘마스터 키튼’ 이야기를 하자면, 한 권 한 권 읽으면 읽을수록 이 만화는 ‘아는 기쁨’이 주는 생명력과 삶의 활기를 잘 보여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삶의 의미를 잃고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에게 키튼은 ‘저는 아직 알고 싶은 게 많습니다. 그래서 죽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가 하면, 살인을 결심한 어느 학생은 동급생인 키튼이 학교 벽에서 화석을 발견하고 눈을 빛내며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는 그 광경에서 감화를 받아 살인을 포기한다. 어쩌면 현재를 아직 오지 않은, 영원히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미래에 담보잡히지 않고 현재 그 자체로서 충만하게 살아갈 수 있게끔 하는 가장 훌륭한 원동력이 바로 호기심이 아닐까.

거울을 바라보고 서서 스스로를 들여다보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냉소란 녀석이 마음 한켠을 잠식해 들어와서는 어느새 그 그림자를 크게 드리우고 있었다.

마음 속에 들어와 앉은 냉소를 털어버려야겠다.
그러면 그 녀석과 함께 스리슬쩍 찾아와 자리잡고 앉아 있던 무기력도 함께 나갈 것이다.

빈 자리는 호기심으로 채우자.
그러면 ‘아는 기쁨’이 덩달아 찾아들 것이다. 틀림없이.

조커와 배트맨. 그들은 서로 정 반대의 대척점에 서 있다.
그들에게 비슷한 점이라곤 눈에 씻고 찾아봐도 없을 정도다.

배트맨이 입고 있는 건 검은색뿐이다(금빛을 띠는 벨트만 제외한다면). 그리고 그 검은색 전투복은 치밀하게 계산되고 디자인된 최첨단 기술의 산물이다. 쭉 뻗은 직선과 늘씬하게 뻗은 곡선이 어우러진 배트맨의 망토와 전투복은 딱 보기에도 멋지다. 우리 눈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황금비율, 비례. 그런 것들을 배트맨의 전투복은 잘 갖추고 있다. 잡티 하나 안 보이는 말쑥한 검은색 또한 엄숙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풍긴다.

이 세상 모든 색깔을 섞으면 결국 검은색이 된다고 했던가. 조커는 검은색 속에 감춰져 있던 화려한 색깔들이 한꺼번에 터져나온 것 같은 모습이다. 머리카락에선 초록빛이 돌고, 얼굴엔 새하얀 분칠을 하고 그 위에다 시뻘건 원색으로 커다랗게 비뚤비뚤한 입술을 양 볼에 죽죽 그어 놓았다. 그뿐인가. 입고 있는 옷은 원색에 가까운 보라색이고, 행여나 노란색이 자기만 빼놨다고 서운해할까 싶어서 이빨은 온통 누렇게 칠해 놓았다(칠한 건지, 안 닦아서 상한 건지는 모를 일이지만).

배트맨은 고담시의 질서를 상징한다. 그는 부패와 범죄로 가득찬 무법지 고담시에 법질서를 확립하려고 한다. 나쁜 놈은 잡아 가두고, 나쁜 놈한테 당하는 좋은 놈은 구해 주고.
인간 세계에서 법질서를 엄정하게 확립하는 데 있어 언제나 걸림돌이 되는 것은 그 집행자 또한 감정에 휘둘리는 나약한 인간이라는 점이다. 그러면 안되는 줄 알지만 아픈 어머니 병원비를 대려면 어쩔 수 없이 경찰도 갱단과 뒷거래를 하고(라미레즈 형사처럼), 그러면 안되는 줄 알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법적 절차 같은건 무시하고 사람 머리에 총구를 들이대고 협박하고 하게 되는 것이다(하비 덴트처럼).

그러나 배트맨은 사람이 아니다. 진정으로 법질서를 확립시키는 존재가 되려면 배트맨은 사람이 아니어야만 한다. 브루스 웨인은 [배트맨 비긴즈]에서 이미 이 점을 간파했다. 그는 말했다 : 악당들이 그 이름만 듣고 두려워할 존재가 되어야 한다 - 상징(symbol)이 되어야 한다. 사람은 부패시킬 수 있고, 죽일 수 있고, 쓰러뜨릴 수 있다. 그러나 상징은 부패되지 않는다. 죽지도 않는다. 그 어떤 녀석도 상징을 쓰러뜨릴 수는 없다. 그래서 브루스 웨인은 자기 자신으로서가 아니라, 가면을 뒤집어쓰고 정체를 숨긴 '박쥐'라는 상징으로서 범죄와 싸우기로 한다.

중요한 건 그렇게 인간성을 탈피한 상징이 된다는 것이지, 그 상징으로 뭘 택할지가 아니다. [비긴즈]에서 알프레드는 묻는다. "왜 하필 박쥐입니까"라고. 브루스 웨인의 대답은 간단하다. "내가 박쥐들을 무서워하니까. 이제 내 적들도 내 공포를 함께 느낄 때다." 굳이 그 상징이 박쥐가 되어야만 할 이유는 없었다. 거미라도 좋고 잠자리여도 그만이다. 중요한 건 그렇게 함으로써 그가 법질서 그 자체, 악에 대항하는 선 그 자체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에 반해 조커는 무질서 그 자체다. 그의 움직임은 도무지 예측할 수가 없다. 그가 뭘 할지,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는 수수께끼다. 영화 내내 조커는 불쑥불쑥 튀어나올 때마다 우리를 놀래키고, 반대로 우리는 그 녀석이 언제 튀어나올 지 몰라 전전긍긍한다.

영화가 시작하는 은행강도 장면을 떠올려 보자. 조커에 의해 고용된 사람인줄만 알고 있던 가면쓴 녀석들 중 한 명이 갑자기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모두....날 더 이상하게 만든다"고 내뱉으면서 가면을 벗고 얼굴을 보여준다. 그러자 조커의 그 기괴하게 생긴 얼굴, 그 섬뜩한 웃음 - 사실 언제나 웃고 있는 얼굴이긴 하지만 - 이 화면 전체를 가득 메운다. 이처럼 첫 등장에서부터 그는 예기치 못한 순간에 튀어나왔다.

고담시 시장이 하비 덴트와 이야기를 나누며 느긋하게 창밖을 내다본 순간, 갑자기 배트맨 옷을 입은 사람의 시체가 창문에 쿵 하고 와서 부딪친다. 공포영화 보는 것처럼 관객의 심장은 떨어진다. (나와 같이 영화를 보던 친구는 심지어 두 번째 보는 것이었으면서도 이 때 의자에서 떨어질 뻔하더라ㅋ)

하비 덴트를 태운 호송차가 감옥을 향해 가는 도중, 웬 거대한 트럭 하나가 길에서 빵빵댄다. 단속을 위해 경찰관이 창으로 다가가자 갑자기 조수석에서 조커가 장총을 들고 튀어나와 경찰을 쏴 버린다.
모두가 탈출한 병원 안. 경찰관 하나가 남은 사람들을 확인하기 위해 병실로 들어간다. 뒤돌아 서 있던 간호사가 고개를 돌리며 갑자기 경찰을 총으로 쏜다. 마스크를 벗으니 그 간호사 또한 조커였다.

조커의 등장은 언제나 이런 식이다. 그는 영화 내내 갑자기 나타나 관객을 놀라게 할 뿐만 아니라, 영화 속에서도 고담시 전체를 언제나 놀라게 한다. 그 누구도 그가 다음에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그에겐 규칙이 없다. 그에겐 어떠한 규범도 없다. 조커 스스로가 자신을 칭하는 것처럼, 그는 '혼돈의 사자(Agent of Chaos)'다.

질서의 사자 배트맨. 혼돈의 사자 조커.
질서 대 혼돈. 그 치열한 대결을 그린 것이 [다크나이트]일까? 조커는 체포되었고 배트맨은 어쨌든 힘겹게나마 살아남았으니, 혼돈을 없애고 질서가 승리한 것일까?

나는 [다크나이트]가  그보다는 훨씬 더 복잡한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질서의 사자 배트맨, 혼돈의 사자 조커. 그리고 그 둘의 대결.
여기까지는 그렇게까지 흥미로운 구석이 없다. 나쁜놈하고 착한놈하고 싸우는 영화 한두 개 봤나 뭐. 여기서 끝이라면 [다크나이트]는 [배트맨 비긴즈]나 [슈퍼맨 리턴즈], [스파이더맨]과 다를 게 없다.

[다크나이트]가 흥미로워지는 건 바로 질서와 혼돈 사이의 관계, 즉 배트맨과 조커 사이의 관계를 이야기하면서부터다.

조커가 처음 갱단 두목들의 회합장소에 불쑥 나타나서 '배트맨을 죽이자'고 제안했을 때까지만 해도, 배트맨은 물론이고 관객들 모두 그것이 진짜 조커가 원하는 바인줄 안다. 다른 갱단 녀석들과 마찬가지로 조커도 배트맨을 눈엣가시로 생각하고 있구나 하고 다들 생각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그렇지 않다. 조커는 배트맨을 없앨 생각이 전혀 없다. 배트맨과 경찰 취조실에서 대면했을 때, 배트맨이 "날 죽이려고 하는 이유가 뭐냐"고 묻자 조커는 낄낄거리며, 예의 그 광기어린 파안대소를 퍼부으며 이야기한다. "널 죽이다니? 너 없이 내가 어떻게 살아? (아마도 Where would I be without you? 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렇다. 조커는 배트맨을 죽이고 싶어하지 않는다. 오히려 배트맨이 계속 살아 주었으면 한다. 그래서 자신과 계속 놀아 줬으면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자. 처음 방송국에 보낸 협박 영상 - 배트맨 흉내를 내던 사람을 살해하는 동영상 - 에서 조커는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배트맨 때문에 고담시 시민들이 어떻게 됐는지 봐. (그리고는 카메라를 돌려 자신의 얼굴을 화면에 보여준다) 이렇게 미쳐가고 있잖아."

이 협박 영상을 보고 난 뒤 브루스 웨인과 알프레드가 나누는 대사는 더 의미심장하다.
"이건 도가 지나쳐. 갱단 녀석들이 선을 넘었어."
"주인님께서 먼저 선을 넘었지요. 저들을 너무 압박하고 코너로 몰아붙였습니다. 그러자 절박해진 저들이 그들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는 자를 끌어들인 겁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배트맨 때문에 조커가 나타났다.
고담시에 배트맨이 나타나기 전에는 조커 또한 없었다. 조커는 배트맨의 필연적인 부산물이다.
상징화는 언제나 상징으로 완전히 포섭되지 않는 잔여물을 남긴다. 일견 완전해 보이는 질서체계는 언제나 그 가장 근원적인 지점에 균열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를 생각해 보라).

실제로 존재하는 세계와 그 세계를 인식하기 위해 우리가 사용하는 기호(언어가 가장 대표적이다) 사이에는 언제나 불일치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내가 '책상'이라는 말로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사물을 지칭할 때, 그 사물과 '책상'이라는 기호 사이에는 필연적으로 불일치가 발생한다('책상'이라는 말은, 모든 단어가 그렇듯이, 일반개념이다. 그러나 현실세계에 존재하는 책상은 언제나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존재인 것이다). 또, 내가 '책상'이라고 하면서 떠올리는 의미와 다른 사람들이 '책상'이라는 기호를 통해 떠올리는 의미는 절대로 똑같지 않다. 즉, 엄밀한 의미에서 세계를 언어를 통해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더 나아가 그 언어를 가지고 완벽한 의사소통을 하는 것은 더 불가능하다. 그러니 당연히 인간이 세계를 완전히 자신의 인식에 근거해서 조종하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 수많은 개념들을 통해 정치하게 짜여진 법질서를 통해 인간은 세계를 조종하려고 하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그것이 얼마나 불완전한 것인지를 알 수 있다(교과서를 통해 민법이나 형법의 해석론을 볼 때는 치밀하게 잘 짜여져 있다는 느낌을 받다가도, 실제 사례에 법을 적용할 때는 언제나 애매하고 어딘지 잘 들어맞지 않는 느낌이 드는 것을 떠올려 보라).

그렇다면 우리가 질서를 이루고 살아갈 수 있는 것, 우리가 기호를 사용해 의사소통을 하며 살아가는 것, 하나의 체계가 성립할 수 있는 것은 어떻게 해서인가? 바로 그 질서가 내포하고 있는 불완전성을 잊음으로써, 그것을 외면함으로써이다. '책상'이라는 말로 서로 떠올리는 의미는 같지 않지만, 그 대강의 뜻은 통한다. 그러니 사람들은 차이를 잊는다(외면한다). '책상'이라는 말에는 고정된 하나의 의미만이 있는 것이라고 믿어 버린다. 그런 외면, 그런 거짓말을 통해 체계는 비로소 성립할 수 있다.

정치한 질서라 함은 곧 그러한 불완전성이 아주 교묘하게 가려져 있는, 사람들이 불완전성을 너무도 잘 잊고 있는, 모두들 그걸 알아채지 못하고 있는 질서를 말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체계의 불완전성, 질서 속의 균열을 언제까지고 감출 수 없다. 질서의 성립 저편에 감추어져야만 했던 잔여물들, 질서 속에 포섭되지 못한 채 남아있던 나머지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 생긴다. 그 잔여물들은 말 그대로 질서의 바깥에 있는 것들이기에 질서체계 속에서 그것들은 인식될 수 없고, 이해될 수 없음이 논리적으로 자명하다. 질서 속에 서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잔여물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규칙이나 합리성을 거부하는 것, 그렇기 때문에 끔찍하게 공포스러운 것으로 다가온다. 바로 '혼돈 그 자체'인 것이다.

배트맨이라는 무자비하게 엄격하고 정치한 질서가 출현했다. 부패경찰은 점점 없어져 가고, 뒷골목을 주름잡던 범법자들은 이제 밤을 두려워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부패시킬 수도, 죽일 수도, 쓰러뜨릴 수도 없는 완벽한 질서가 나타난 것이다. 고담시에는 배트맨과 함께 안정된 질서가 확립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러한 정치한 질서체계가 성립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질서가 포섭하지 못하고 남겨둔 잔여물이 그동안 감춰져 있던 모습을 마침내 드러내고야 말았다. 언뜻 보기에 너무나도 완전해 보이는 질서체계였기에 그 균열이 나타나면서 일으킨 충격 또한 엄청난 것이었다. 띠끌 하나 안 보이는 완벽한 검은색 저편에 남겨져 있던 초록색하얀색빨간색노란색보라색 - 바로 조커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다시 말해 배트맨이 없다면 조커는 존재할 수 없다. 거꾸로 조커 없이 배트맨 또한 존재하지 못한다. 질서 체계는 일정한 잔여물을 남길 수밖에 없고 동시에 그 잔여물을 남겨야만 성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조커는 배트맨을 죽이고 싶어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애초에 죽일래야 죽일 수가 없다. 그리고 배트맨 또한 조커를 죽이지 못한다.

이러한 둘의 관계를 극적으로 보여 주는 장면이 바로 배트맨이 오토바이를 타고 전속력으로 조커에게 돌진해 가는 장면이다. 어느 한쪽 없이는 도저히 존재할 수 없는 두 존재가 서로를 향해 돌진하는 순간. "날 들이받아! 날 들이받아봐!" 라고 외치는 조커를 끝내 배트맨은 오토바이로 들이받지 못한다. 마치 무슨 초자연적인 힘에 이끌린 것처럼, N극과 N극이 서로 부딪치는 것처럼 배트맨의 오토바이는 마지막 순간에 조커를 비껴가고 만다.

배트맨은 거기서 조커를 피해갈 수밖에 없다. '살인을 하지 않는다'는 규칙을 어길 수 없으니까. 마지막 순간까지 배트맨은 분노에 찬 신음을 흘리며 조커를 죽여 버릴지를 고민하지만, 그 때 고민하는 것은 질서의 상징 박쥐가 아니라 가면 뒤에 있는 인간 브루스 웨인이다. 감정을 사상해 낸 법질서 그 자체로서의 배트맨으로서는 그 순간 조커를 죽이는 것이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영화 마지막의 대결에서 조커를 건물에서 스스로 집어던져 놓고도 끝내 그의 발을 붙잡아 끌어올릴 수밖에 없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그것이 배트맨과 조커의 숙명이자, 질서와 혼돈 사이의 본질적인 관계다. 거꾸로 매달린 조커가 이야기하지 않던가.

"아마 너하고 나는 이 짓을 평생동안 계속하게 될거야..."


이처럼 배트맨이 있는 곳에 언제나 필연적으로 조커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면, 고담시는 어찌 되는건가? 괜히 애꿎은 사람들만 계속해서 조커의 테러에 죽어나가야 하는건가? 이해할 수도 없고 도무지 예측할 수도 없는 이 혼돈을 어떻게 감당해 내란 말인가? 실제로 영화에서 조커의 테러행각에 고담시는 전체가 엄청난 혼란에 휩싸인다. 공포는 무지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혼돈이야말로 가장 공포스럽다. 알프레드가 말한 것처럼, 조커는 "타협할 수도 없고, 윽박지를 수도 없고, 매수할 수도 없는 사람", "그냥 세계가 불타는 것을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조커'라는 혼돈은 혀를 날름거리며 고담시 전체의 질서를 뒤엎어버릴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것이다.

질서의 '성립'이 필연적으로 혼돈을 수반한다면, 질서의 '유지'는 앞서도 언급했듯이 그 혼돈을 잊어버림으로써만 가능해진다. 포섭되지 못한 균열, 혼돈의 심연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은폐되어야 한다. 즉, 우리에겐 우리의 질서가 완전하다는 환상, 일종의 거짓말이 필요하다.

이건 비단 사회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모두의 존재양식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우리의 행동을 낳는 욕망 체계는 실상 그 한가운데 본질적인 균열을 담고 있다. 그리고 그 균열은 환상에 의해 지탱된다. 사람들은 그 본질적 균열, 그 공허를 잊기 위해 뭔가 하나의 대상을 붙들고 그 대상만 쟁취하면 우리 욕망은 만족되고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학 입학 시험만 합격하면 된다. 사시만 붙으면 된다. 취업만 하면 된다. 저 사람의 사랑만 얻으면 된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경험을 통해 알듯이, 그 어떤 대상도 우리에게 완전한 만족을 주지는 못한다. 대학 합격했다고 모든 일이 해결되는 게 아니다. 사시 붙었다고 모든 게 해결되는 게 아니다. 취업하면 그때부터 또 첩첩산중이다. 그 사람의 사랑을 얻었다고 해서 내 공허함이 메워지지는 않는다. 우리 삶의 근본적 무의미성은 끝내 완전히 채워지지 못한다. 우리 모두는 가슴 한가운데 뻥 뚫린 구멍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 순간 하나의 목표를 붙들고 그 목표를 달성하면 문제가 다 해결될 거라고 믿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갈 수 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 행위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해야만 한다. 대입시험이, 사법시험이 또는 취업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열쇠라고 믿어야만 하는 것이다.

한 사람의 존재양식이 거짓말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는 걸 잘 보여준 것이 바로 [다크나이트]의 감독 크리스토퍼 놀런의 전작 [메멘토]였다. [메멘토]의 충격적인 결말에서, 우리는 단기 기억상실증을 앓고 있는 주인공 레너드가 스스로의 기억을 조작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 그의 삶의 전부는 바로 자신의 아내를 죽인 살인자를 찾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 그 살인자는 이미 잡혔으며 아내는 사실 자신이 실수로 죽였다는 것이 진실임을 레너드는 깨닫게 된다. 감당하기 힘든 진실, 감당할 수 없는 삶의 공허와 대면한 레너드는 그 순간 자신의 단기 기억상실증을 이용해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한다. 엉뚱한 사람이 살인자라고 메모를 해 둔 것이다. 그리고는 말한다. '거짓말을 해서 행복해질 수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 이제 단기 기억상실증 환자인 레너드는 조금전까지 있었던 일은 다 잊어버릴 것이다. 그리고는 자신이 해 둔 메모를 보고는 정말 그 사람이 살인자라고 믿게 될 것이다. 그렇게 레너드는 영원히 환상 속의 살인자를 쫓아가며 살아갈 것이다(그래야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다크나이트]로 돌아와 보자. 레이첼이 죽고 난 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브루스 웨인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소파에 앉아 있다. 알프레드가 아침식사를 들고 다가온다. 아침식사를 담은 그릇에는 레이첼이 미리 써 둔, 브루스 웨인에게 보내는 편지가 놓여 있다. 편지에서 레이첼은 브루스 웨인을 떠나겠다고, 배트맨이 없어진다 해도 그에게 가지는 않겠다고 써 놓았다. 알프레드가 자리를 뜨려는 순간, 브루스 웨인이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뭐에 홀린 사람처럼 내뱉는다. "레이첼이 기다려준다고 했었는데..."라고. 그 순간 알프레드는 편지를 도로 가져간다. 그리고 그 편지를 불태워 버린다.

이것이 바로 브루스 웨인에게 필요한 거짓말이다. 레이첼이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 언젠가 배트맨을 그만두면 사랑하는 레이첼과 행복하게 살 수 있었다는 것.
이는 물론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믿어야 브루스 웨인은 계속해서 가면을 쓰고 배트맨 짓을 할 수 있다. 브루스 웨인이 바라는 것은 배트맨 없는 '정상적인 삶'이다. 그런 정상적인 삶이 언젠가는 가능할 것이라고 믿어야만 힘든 배트맨 생활을 하루하루 견뎌낼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이미 브루스 웨인에게 배트맨을 그만두고 '정상적인 삶'을 산다는 건 불가능할 지 모른다(레이첼 역시 영화에서 그 점을 지적했다). 고담시에 배트맨은 영원히 필요하다. 브루스 웨인에게 다시는 정상적인 삶이란 없다. 그러나 그 점을 깨닫는 순간 브루스 웨인은 삶의 의미를 잃고 무너져내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알프레드는 편지를 태워버려야만 했다. '정상적인 삶'이 손 닿을 거리에 있다는 거짓말이 브루스 웨인에게는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고담시 사람들에게는 영웅 하비 덴트라는 거짓말이 필요하다. '하비 덴트는 죽는 순간까지 타락하지 않고 악에 맞선 영웅이었다. 나쁜 놈은 배트맨이다. 그녀석 때문에 일이 다 잘못됐다.'라는 것짓말, 바로 이 거짓말 때문에 조커라는 혼돈을 은폐하고 비로소 고담시의 질서는 유지될 수 있다. 이해할 수도 없고 예측할 수도 없는 것은 비난의 대상으로 삼을 수도 없다(고담시 사람들이 왜 조커를 탓하지 않느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조커가 바로 혼돈 그 자체를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라고 본다면 이는 이해할 수 있는 현상이다). 그러나 배트맨은 다르다. 그는 규칙에 의해 움직이는 자, 우리가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녀석이다. 게다가 아무도 그의 실제 정체를 모르기 때문에 - 그는 그냥 상징에 불과하기 때문에 - 거꾸로 그 녀석에게 뭐든지 덮어씌울 수 있다. '이게 다 배트맨 때문이다'라고. 마지막 장면에서 배트맨은 의미심장하게도 이렇게 말한다. "난 고담시가 필요로 하는 것이라면 뭐든지 될 수 있다."

마지막 장면, 배트맨은 자기 탓이라고 거짓말을 하라면서 이렇게 말한다. "진실만으론 부족하다. 때론 사람들에겐 진실 이상이 필요하다..." 그렇다.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선 진실이 아닌 진실 이상, 환상이 필요한 것이다. 비난을 감수하기로 결심함으로써, 거짓말을 하기로 결심함으로써 배트맨은 자기 몸으로 조커가 열어 놓은 균열을 틀어막으면서 고담시의 환상을 완성시킨다.

이제 비로소 고담시 사람들은 패닉상태에서 벗어나 질서 속에서(비록 그것이 근본적으로는 불완전한 것이라고 해도)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 질서의 불안전성이 잠깐잠깐 드러나는 순간은 계속 있을 것이다. 범죄는 여전히 발생할 것이고, 법이 제대로 집행되지 못하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 때문에 고담시가 혼란의 도가니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건 다 배트맨 때문이다'라며 그 정도는 넘어갈 수 있으니까. 배트맨만 잡으면 된다고 믿을 테니까.

(그러나 우리는 고든 경찰청장이 결코 배트맨을 잡지 않을 것도 알고 있다. 고든은 배트맨을 잡지 않아야만 한다. 배트맨이 체포되는 순간 고담시의 환상 또한 깨져버리니까. 배트맨은 영원히 도망다니면서,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으면서 고담시의 모든 문제를 자신의 탓으로 뒤집어써 줘야 한다.)

고담시의 질서 그 자체인 배트맨은 역설적으로 자신이 그 질서를 파괴하는 무법자인 것처럼 거짓말을 해야만 고담시의 질서를 유지시킬 수 있다. 그래야만 질서에 대한 근원적이며 해결 불가능한 위협인 조커를 은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배트맨은 결코 '백기사'가 될 수 없다. 그는 고담시를 지탱해 주는 기사지만, 스스로 모습을 숨김으로써만 그렇게 할 수 있는 기사, 바로 '암흑의 기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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