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on 2012/03/31 13:55
Filed Under 주절주절/기타
미드 '프라이데이 나잇 라이츠(Friday Night Lights)'는 미식축구 드라마를 가장한 가족물이다.
미식축구를 몰라도 이 드라마의 진가를 느끼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다. 야구를 몰라도 H2가 감동적이듯이, 미식축구를 몰라도 FNL을 수놓는 수많은 캐릭터들과 함께 울고 웃을 수 있다. 얘네들도 결국 우리하고 똑같은 삶을 사는 거니까. 미식축구는 단지 얘들을 엮어주는 매개체 역할을 할 뿐이다.
주인공인 테일러 감독 부부(카일 챈들러와 코니 브리튼)의 모습이야말로, 실현 가능한 범위 내에서 가장 이상적인 부부가 아닐까. 감동적인 스포츠드라마를 기대하며 보기 시작했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나도 이런 가정을 꾸리고 싶다/이런 여자와 결혼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많은 비평가들이 미국 티비시리즈 가운데 손꼽히는 걸작으로 주저없이 뽑는다. 그러나 FNL은 방영 내내 시청률 부진으로 항상 폐지 위기에 있었다고 한다. 미국이나 우리나라나 시청률과 작품의 훌륭함이 항상 비례하지는 않는 모양이다. 극도의 시청률 부진에도 불구하고 시나리오를 엉망으로 뜯어고치지 않고 뚝심있게 밀어붙였다는 것, 그리고 조기종영하지 않고 다섯 개의 시즌이나 제작해낼 수 있었다는 게 차이라면 차이겠다. 물론 여기엔 운이 많이 작용했겠지만.
엔딩은 또 얼마나 완벽하게 감동적인지.
마지막회를 보면서는 며칠째 누적된 수면부족으로 눈은 뽑혀나오기 직전이었고, 두통으로 머리가 쪼개질 것 같았지만 그딴 건 아무 상관이 없었다. 열시간동안 모니터를 들여다보느라 안구가 말라비틀어지지 않았더라면 눈물을 펑펑 흘렸을거다. 캐릭터들 한 명 한 명과 깊이 공감하고 이 정도로 감정적으로 몰입했던 적이 또 있었는지 모르겠다. 시리즈가 끝났다고 생각하니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것마냥 마음이 허하다.
난 작년 한해 TV시리즈는 'The Wire' 하나 본 걸로 족하다고 생각한다. 나머진 안 봐도 그만이었다.
올해는 'FNL'을 봤으니 됐다.
[+] 과도한 조명과 비현실적인 의상, 일상생활에서는 도무지 사용하지 않는 문장들만 책읽듯이 내뱉는 사람들, 불치병으로 쓰러지는 남녀노소들, 아버지인 줄 알았던 재벌 회장님과 애인이었던 줄 알았던 오빠와 어머니인 줄 알았던 누나들, 말도안되는 단서를 토대로 김전일이나 셜록홈즈 저리가라 수준의 신내림에 가까운 추론을 해대며 사건을 해결하는 천편일률적인 범죄추리(영드 '셜록'은 제외: 셜록홈즈 본인께서 나오시니 봐줄수밖에)가 지겨운 사람들;
영화나 티비드라마는 단지 현실도피의 수단일 뿐이고, 따라서 현실성이 있든 없든 내 환타지를 모두 충족시키는 내용이어야 한다는 주장에 결코 동의할 수 없는 사람들; 좌절과 실패, 갈등과 우연으로 뒤덮인 우리 실제 현실에서야말로 진정한 감동과 아름다움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러한 현실의 간접경험을 통해 삶에 대해 배우고 느끼끼고 싶은 사람들.
'Friday Night Lights'를 강력추천합니다. 다만 감정의 골이 깊은 분들은 주의하세요. 마지막에 헤어지고 나면 후유증이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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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on 2012/01/26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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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진 화살을 분실한 것, 증거물 보존은 고사하고 재연 실험을 한답시고 범행에 사용된 바로 그 석궁을 들고 가서 쏴 보다가 석궁을 망가뜨림으로써 핵심 증거물을 훼손한 것. 사람들은 CSI에 익숙하다. 그들이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보고 음모론으로 기우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하다.
1심 속기록을 보면 피고인은 계속해서 '증거와 증명하고자 하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명시'하라고 형소법규칙을 들며 주장한다. 그런데 이 주장에 대해서는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해당 공판에서나 보통의 형사재판에서나 검찰의 현재 공판수행 관행을 볼 때 검찰 측이 공소사실 입증논리를 법정에서 상세하게 펴는 경우가 매우 드문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물론 직권주의적 요소가 강한 우리 형사재판의 특성상 판사가 공판 과정에서 주도적 위치에 설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검찰 측에서도 판사를 주로 염두에 두고 공판수행을 하는 것이라고 이해 못 할 바도 아니다. 법정에서 길게 이야기하느니 잘 정리해서 서류로 작성해서 제출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어차피 배심원들이 아닌 판사가 재판하는 것이고, 판사는 서류를 읽어 볼 테니까. 그렇지만 구두변론과 공개재판의 원칙상 피고인은 물론이고 일반 방청객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상세하게 공소사실 논증 과정을 설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논증 구조를 상세히 밝히는 것은, 이 사건에서 드러난 것처럼 피고인이 효과적으로 스스로를 변호하고 방어논리를 구축하는 데 있어서도 필수적이다.
내의와 런닝에는 화살구멍 주위로 핏자국이 있고, 조끼에도 핏자국이 있는데 가운데 입었던 와이셔츠에는 핏자국이 없다는 사실, 그리고 범행에 사용된 석궁으로 수행한 실험 결과 정상적으로 발사한 경우 피해자가 입은 경미한 상처보다 훨씬 심한 상해가 발생한다는 사실.
법정에서 증언한 석궁 전문가는 범행도구를 보고 '초보자들이 흔히 하는 것처럼 잘못 장전해 온 흔적이 보인다'는 취지로 이야기했고, 심지어 피고인도 '집에서 다다미에다가 쏴 봤을 때 1-1.5cm 정도만 박혔다'는 취지로 이야기한 적이 있다. 따라서 피고인이 석궁을 (평소에 하던 것처럼) 잘못 장전한 채 짧은 거리에서 발사한 탓에 상처가 깊지 않았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항소심에서도 증인신문을 하는 편이 더 옳지 않았을까.
그러나 중요한 점은 이 사건에서 피고인과 변호인이 유전자 감식결과의 내용이 불충분하다고 이의를 제기하며 피해자의 유전자와 혈흔의 유전자가 같다는 점을 감정해 달라고 강하게 요구했다는 사실이다. 만약 그런 상황이라면 이를 굳이 한사코 거부할 이유도 딱히 없다. 앞서 말한 것처럼 상식적으로 가장 공소사실 입증에 적합한 유전자감식결과는 "옷가지의 피가 모두 같은 사람 것이다"라는 게 아니라 "옷가지의 피가 피해자의 피다"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법원의 주장과 달리, 이를 확인할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다. 피해자의 동의를 얻어 채혈을 하거나, 심지어 머리카락 한 가닥만 얻으면 되는 일이니까. 그리고 그 감정 결과가 검찰과 법원의 생각대로 나온다면 증거가 조작됐다는 피고인의 주장에 큰 타격을 줄 수 있을 테니까, 법원 입장에서도 까짓 거 감정신청 받아주고 감정 해버리는 게 나을 수도 있다.
피고인은 흉기휴대상해죄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일부에서 오해를 하고 있듯)살인미수죄가 아니다. 그리고 범행에 직접 사용된 화살이 없고, 와이셔츠에 핏자국이 없지만, 판결문에 적시한 다른 여러 가지 사정으로 미루어 피고인에게 피해자를 상해할 고의가 있었고, 석궁을 사용하여 상해를 가하였다는 사실을 합리적 의심 없이 입증하기에 충분하다고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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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on 2011/12/28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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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회 때와 수상작 선정 기준은 같습니다. 철저히 내 맘대로입니다. 2011년 나에게 가장 의미가 있었던 것들에게 상을 수여합니다. 영화, 앨범, 노래 등이 올해 출시된 것인지 아닌지도 고려하지 않습니다.
시상 기준, 부문 결정, 선정 이유 죄다 내맘대로인, 2011년을 내가 좀 더 잘 기억하기 위해서 거행하는 시상식.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 올해의 노래 : 브로콜리너마저, 졸업
작년에 이어 브로콜리너마저는 2년 연속 이 부문 상을 차지했다. 사실 올해도 새로운 음악을 많이 챙겨 들으려 했고 또 실제로 이것저것 들어 보았지만, 작년처럼 '이거다!' 싶은 노래가 없었고 작년만큼 한 곡에 빠져서 무한 반복 재생했던 노래도 없었다. '졸업'은 분명 올 한해 내가 가장 많이 들은 노래는 아니다. 그러나 '올해의 노래'를 하나 뽑아야 한다면 이 곡을 고를 수밖에 없다.
2011년 나는 20대 후반이다. 내가 가장 잘 공감할 수 있는 것도 또래인 20대 중후반 사람들일 것이다. 사회생활을 막 시작하려는 사람들이고, 전 세계적인 경제 위기와 증가한 불안정성으로 인해 갈 길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이다. 특히나 청년실업과 경제적 양극화 문제가 곪을 대로 곪은 우리나라의 20대는 더욱 힘들고 불안하다. 20대의 경제적 위기는 2011년에 갑자기 등장한 문제가 아니다. 우석훈이 '88만원 세대'라는 책을 통해 문제제기를 한 지 이미 3년도 넘었다. 그러나 내게 있어서 올해는 좀 더 특별하다. 경제적, 사회적 안정성의 상징처럼 보였던 사법시험 합격자들조차 경제적 불안의 늪을 피해갈 수 없다는 점이 극명하게 드러난 첫 해가 바로 2011년이기 때문이다. 법학전문대학원이 설치되었을 때부터 기존의 제도에 따라 사법시험에 합격한 사람들의 미래가 예전처럼 안정적이지는 않으리라는 예측은 많았다. 그리고 올해, 법학전문대학원 1기들이 대학원을 수료하고 취업시장에 쏟아져 나오는 첫 해, 신진 법률가들의 취업시장은 막연히 예측했던 것보다 훨씬 더 힘들어졌다. 법학전문대학원의 출현에다 경기 불황, 공공기관 채용인력 감소 등의 악재가 겹치면서 취업 문은 바늘구멍이 되었다. 나는 그야말로 운이 좋아서 이 취업난을 아슬아슬하게 비켜갔지만, 이제 막 법률가로 사회에 진출하는 많은 친구들을 통해 어느 정도는 충격을 느낄 수 있었다. 말하자면 올해는 내가 '88만원 세대의 시대'를 피부로 느낀 해였던 셈이다.
대한민국 20대가 맞는 2011년을 '졸업'만큼 잘 보여 주는 노래가 또 있을까. 직장을 찾지 못해 "쫒기듯 어학연수를 떠나" 사회진출을 유예하고, 본인의 꿈과는 무관하게 그나마 있는 일자리에 "팔려가는" 사람들. "그 어떤 신비로운 가능성도 희망도" 찾지 못하는, 유산상속이나 유산상속을 이용한 혼테크만이 경제적 안정성을 확보하는 유일한 길이 되어버린 '이 미친 세상'. 브로콜리너마저는 나른하게 지친 목소리로 "이 미친 세상에 어디에 있더라도 널 잊지 않을게, 이 미친 세상에 어디에 있더라도 행복해야 해"라고 외친다. 우리 20대의 현재 모습은 대개 그럴 것이다. 우리는 그간 미친 세상 속을 살아오느라 너무 지쳤다. 그저 간신히 서로의 건투를, 행복을 빌어 줄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 노래는 2절을 지나 막판으로 접어들면서 분위기가 미묘하게 바뀐다. 2절 후렴이 끝나면, 쿵쿵 울리는 드럼비트만이 강조된 간주에서 "이 미친 세상에" 여섯글자 노랫말만 우직하게 반복되는데, 여기서부터 신기하게도 노래는 무기력의 바닥을 치고 다시 서서히 가슴속에 힘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뒤 나오는 노랫말은 슬쩍 "이 미친 세상을 믿지 않을게"로 바뀌어 있다. 이는 '세상을 내가 바꾸겠다'는 태도까지 나간 것은 아니더라도, "행복해야 해"나 "널 잊지 않을게"보다는 분명 적극적인 자세이다. 젊은이들이 세상이 미쳐 있음을 깨닫고 그에 적극적으로 맞설 의지를 조심스럽게 마련하는 시점. 나는 그게 바로 2011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졸업'은 정확히 그 시점을 담아내는 노래다.
나는 브로콜리너마저가 이 노래를 라이브로 부르는 것을 올해 세 차례 들었다.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한 번, 서울대 총장잔디에서 열린 '본부스탁' 공연에서 한 번, 그리고 크리스마스 정기공연 '막차'에서 한 번. 전주국제영화제는 내가 브로콜리너마저의 라이브를 최초로 본 때였고, 사운드나 공연 연출은 '막차' 때가 최고였다. 그러나 나는 '본부스탁'에서 총장잔디를 가득 메운 사람들이 무한반복되던 후렴구를 떼창하던 모습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 올해의 음악과 함께한 순간 : 2011 지산밸리 락 페스티벌 셋째날, 델리스파이스의 '챠우챠우' 공연
나는 뒤늦게 '챠우챠우'에 빠졌다. 2008년 무렵부터 무척 많이 들었고, 2009년 사법연수원 2년차 때는 거의 귀에 달고 살았다. 휴식시간도 없이 일곱시간씩 시험을 치는 악명높은 2년차 시험기간에는, 시험을 마치고 가방을 챙기고서는 기계적으로 이어폰을 꼽고 '챠우챠우'를 틀고는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초반 전주의 드럼비트와 기타소리를 들으면 지친 머리의 피로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그런 '챠우챠우'를 드디어 라이브로 들은 것이 바로 지산밸리 락 페스티벌에서였다. 비가 쏟아지는 날이었지만 사람들은 구름떼처럼 공연장 바깥까지 길게 몰려들어 노래를 목청이 쉬도록 따라불렀다. 그 날 델리스파이스의 공연은 칠십여분 내내 열광의 도가니였다. 히트곡이 많으니 멘트도 거의 없고 쉬는 틈도 거의 없이 노래를 불렀고, 관객은 쉴 틈 없이 내내 뛰어놀았다. '고백'을 부를 때의 떼창도 압도적이었지만, 화룡점정은 앵콜곡이었던 '챠우챠우'였다. 너무도 익숙한, 그러나 들을 때마다 감동적인 전주가 흘러나올 때. 그 때가 올해의 음악과 함께한 순간이다.
지난 12월 17일에 델리스파이스의 정기공연도 갔다 왔지만, 관객의 열기나 공연장의 분위기는 지산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일부러 델리스파이스를 보러 표를 산 사람들일 테니 팬이 많았을텐데도 호응도나 에너지가 영 별로였다. 공연시간이 여유가 있다 보니 김민규씨가 중간중간 무리하게 멘트를 길게 해서 분위기가 늘어져 버린 탓이었을까. 아니면 연말이라 데이트상대와 공연을 보러 오다 보니 다들 점잔을 떨어야 하는 상황이었을까. 공연장의 열기가 실망스러웠던 건 브로콜리너마저의 '막차' 콘서트 때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마다 취향이야 다를 수 있겠지만, 나는 밴드 공연은 지산 락 페스티벌같이 다같이 뛰어노는 분위기가 훨씬 더 좋다.
- 올해의 드라마 : 와이어(The Wire)
'와이어'는 미국 HBO에서 2002년부터 2008년까지 방영했던 TV 드라마 시리즈다. 전부터 여기저기서 칭찬이 자자했는데, 올해 상반기에 찾아 보기 시작했고 결국 단숨에 최종회까지 달렸다. 이 드라마는 다섯 시즌에 걸쳐 볼티모어 시를 배경으로 미국 도시에서 벌어지는 사회문제들을 냉정하고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마약과 범죄조직, 경찰, 노동조합, 학교교육, 정치, 언론에 이르기까지. '와이어'는 21세기 미국 도시생활의 맨얼굴을 드러내 보인다. 그러나 여기엔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는 영웅적 주인공도 없고, 갈등을 봉합하는 우연적 사건도 행운도 없다. 첫 회부터 마지막 회까지, 볼티모어에 산재한 복잡한 문제점들과 갈등은 여전히 그대로고, 등장 인물들은 하루하루를 그 속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살아갈 뿐이다. 비현실적 설정으로 환상만 심어주고 일시적인 휘발성 위안만을 심어주는 막장 드라마가 성행하는 요즘, '와이어'는 탄탄한 연기와 맛깔스런 대사만 가미하면 우리네 현실만큼 더 극적인 것도 없다고 일침을 날리는 듯하다.
'와이어'는 재기 넘치는 대사가 끊임없이 등장한다. 명대사 100개만을 모아 놓은 클립이 (두 개나)유투브에 떠 있을 정도다. 우리나라 드라마는 등장인물들의 대사가 현실에선 있을 법하지 않은 교과서 말투라서 어색한 경우가 많아서 아쉽다. 표현 수위에 제한이 있어서 그런 탓일까. 상대적으로 등급에 따라 표현수위를 얼마든지 세게 잡을 수 있는 영화는 맛깔스런 대사가 많이 등장하는 걸 보면 그게 맞는 듯하다. 아무리 그래도 욕설을 빼면서 대사도 자연스럽게 만드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을 텐데...
-- 올해의 드라마 2위 : 찬란한 유산
이런저런 이유로 별 생각 없이 보기 시작했는데, 그야말로 만사를 모조리 중단하고 이틀동안 잠도 안 자면서 마지막회까지 봐 버렸다. 비현실적인(그래도 요즘 막장 드라마에 비하면 이정도는 막장이라고까지 하기는 어렵지만) 스토리에 억지 설정이 많은 이 드라마를 이토록 몰입해서 본 이유는 딱 하나, 바로 주인공 고은성 역을 연기한 한효주 때문이다. 굳이 '올해의 드라마 2위'라는 상을 만들어서 주는 것도 순전히 한효주 때문이다. '찬란한 유산'을 보고 나는 효빠가 되었다.
-- 더 이상 못 봐주겠는 드라마 : 하우스
더 엉망이 되기 전에 막을 내리자. 닥터 하우스와 분투하는 휴 로리가 불쌍할 지경.
- 올해의 가상 캐릭터 : '와이어'의 오마르 리틀(Omar Little)
드라마를 보면 안다. 특수강도살인범을 당당히 올해의 캐릭터로 꼽는 게 좀 꺼림칙하긴 한데...준법정신 투철한 샌님들은 원래 캐릭터로는 매력이 없다. 홍길동, 임꺽정 모두 희대의 특수강도/절도범들 아닌가.
트렌치코트에 방탄조끼 동여매고 샷건을 흔들며 휘파람소리와 함께 등장하는, 거물 마약상들만 골라서 터는 강도. 한가닥 한다는 깡패들도 벌벌 떨며 도망가게 만드는, 깡패들을 까는 깡패. 그게 바로 오마르다. 말은 또 얼마나 촌철살인으로 멋지게 하는지, 교육만 제대로 받았다면 공판 변호사를 했어도 잘 했을 법하다. 오마르가 츄리닝에 넥타이 두르고 법정에 나타나 증인석에서 변호인에게 한방 제대로 먹이는 장면은 이제껏 본 모든 법정드라마와 영화를 통틀어 최고다.
-- 올해의 가상 캐릭터 2위 : '찬란한 유산'의 고은성
굳이 2위상을 만든 이유는 역시나 같다.
- 올해의 영화 : 500일의 썸머
올해는 작년보다 영화관 접근성이 좋아져서 영화를 훨씬 많이 봤지만, 극장에서 본 올해 개봉작 중에는 올해 초 뒤늦게 다운받아서 본 '500일의 썸머'를 이길 만한 작품이 없다. 음악과 영상의 조화, 잔잔하게 가슴을 울리는 스토리(특히나 영화 후반부가 좋다. 몇 번이나 돌려 보았다)까지. 전에도 언급했었지만 'Sweet Disposition'이 흘러나오면서 건물의 아름다움을 설명하는 장면은, 왜 그런지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잊혀지지가 않는다.
- 언급하고 가야 하는 영화 : E.T., 킥애스
스필버그의 'E.T.'를 올해 극장에서 재개봉했다. TV에서 띄엄띄엄 보기만 했지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본 적은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 기회를 놓치기 싫어 극장에 달려가서 보았다. 'E.T.'는 명불허전이다. '500일의 썸머'만 아니었으면 1982년에 나온 영화가 새삼스럽게 2011년 올해의 영화가 될 뻔했다.
'킥애스'도 아주아주 마음에 들었다. 스파이더맨 1편 이후 최고의 슈퍼히어로 영화다(감독 매튜 본은 올해 여름 '엑스멘 퍼스트 클래스'를 맡아 꽤나 멋드러지게 만들어냈지만, '킥애스'에 못 미친다. 매그니토와 사비에가 아무리 멋졌다 하나 킥애스의 클로이 모레츠의 간지폭풍에 미치지 못한다). 듣자하니 속편을 만든다던데 몹시 기대된다.
-- 상을 남발해서 상의 가치를 스스로 희석시켜버리는 연말 방송사 시상식들의 잘못을 답습하는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언급하고 가야만 하는 영화 : 오직 그대만
...선정 이유는 생략한다.
- 올해의 풍광 : 열기구에서 내려다 본 카파도키아
이건 자체 제작한 영상으로 설명을 대체한다.
저 풍광을 영상으로 담아 올 수 있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캠코더를 비싼 돈 들여 장만한 것이 아깝지 않다.
물론 하늘을 날며 카파도키아를 바라보는 경험은 절대 영상으로는 온전히 담아낼 수 없는 것이었다.
죽기 전에 열기구로 카파도키아 하늘을 날아 봐서 정말 다행이다.
- 올해의 책 : 노먼 도이지, 기적을 부르는 뇌
최근 뇌과학의 연구 성과를 사례를 중심으로 쉽게 설명하는 책이다. 저자는 뇌의 여러 부위가 각기 일정한 구분된 역할을 담당하며, 뇌의 기능체계는 일단 자리를 잡으면 변하지 않는다는 기존의 이론과 달리, 뇌의 신경체계는 성인이 된 이후에도 변화하며, 부위별로 어느 정도 구분된 역할을 수행하기는 하지만 그 역시 변화할 수 있으며 훈련을 통하여 변화를 촉진시킬 수 있다는 이른바 뇌가소성을 중점적으로 다룬다. 그리고 실제 사례를 통해 생생히 전달되는 뇌과학의 뇌가소성 연구성과는 놀랍기 그지없다. 반고리관이 손상되어 균형감각을 잃은 사람의 혀를 뇌와 연결하여 균형감각을 회복시키는 것이 가능해졌고, 유년기에 뇌 신경발달을 활성화시키는 물질을 규명하고 자폐증의 원인을 분석해 나가고 있으며, 각종 인지장애를 극복하는 학습 프로그램이 개발되어 활용되고 있다.
뇌가소성이 갖는 함의는 단순히 뇌기능 손상을 회복시킬 수 있다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이는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훈련을 통해 뇌신경의 연결체계를 새로 만들고 변화시켜 새로운 기술을 습득해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결국 인간은 누구나 무한한 발전가능성을 갖는다는 뜻이 된다.
나는 두꺼운 이 책을 단숨에 읽어냈다. 읽는 내내 신기한 마법책을 보는 기분이었다.
아니, 이 책은 실로 마법책이 맞다. 그 마법의 이름은 '인간의 가능성'이다.
- 올해의 배우 : 한효주
물론. 난 효빠니까.
- 올해의 통쾌한 스포츠 사건 : 마이애미 히트의 NBA 결승전 패배
아는 사람은 알지만, 나는 아주 오래 전부터 르브론 제임스 안티였다. 그 유치한 정신상태나 그를 지나치게 띄워주는 언론의 태도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실력도 과대평가된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다(이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신체조건을 타고난 건 인정하지만, 덩치를 앞세워 밀고들어가 파울을 유도하는 것 말고 뭐가 있단 말인가-트래블링 일삼는 건 물론이고).
르브론이 마이애미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보쉬와 함께 벌인 쇼, 그리고 그 후 언론의 비판적 반응에 대처(못)하는 모습을 보고는 더더욱 그러한 못마땅함이 커졌다. 드웨인 웨이드까지 싫어질 지경이었다. 그리고는 시즌 내내 마이애미의 상대편을 응원했는데, 어찌보면 가장 통쾌하게도 최고의 무대인 결승전에서 댈러스 매버릭스가 보기좋게 마이애미를 꺾어 주었다. 댈러스의 팬이 된 적이 없고 앞으로도 팬 할 생각이 없지만, 그 결승전에서만큼은 어느 팬 못지않게 열렬히 노비츠키와 댈러스를 응원했다.
2011-2012 시즌도 마이애미가 강력한 우승후보다. 올해도 마이애미 상대편을 응원하고, 마이애미가 이길 때마다 낙담해야 하는 긴 한해가 될 듯하다.
- 올해의 안타까운 스포츠 사건 : MBC게임 채널 폐지 등 스타크래프트 리그의 위기
스타판이 위기다. 언제나 위기라는 말은 있었지만 블리자드와의 저작권 분쟁, 스타2의 등장, MBC게임 채널 폐지결정, 게임단 대거 해체 등의 사건이 터진 올해는 특히 정도가 심했다.
난 스타2가 출시되었기 때문에 이제 스타1 리그는 끝났다는 식의 이야기는 절대 공감할 수 없다. 스타크래프트는 사실상 단순한 컴퓨터게임의 지위를 뛰어넘어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경기를 지속적으로 생산해 낼 수 있는 '스포츠 종목'이 되었다. 아직은 기반이 소규모라고 하더라도 그런 식으로 발전시켜 나갈 잠재력은 충분하다. 오목과 바둑이 다른 종목이고 농구와 축구가 다른 종목이듯, 스타2와 스타1은 그냥 다른 종목일 뿐이라고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지 않은가? 많은 사람들이 스타1을 외면하고 더 이상 사람들이 경기를 보고싶어하지 않는 상태가 된다면야 스타1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가겠지만, 단순히 스타2가 나왔으니 이제 스타1은 외면하자, 혹은 외면될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별 이유도 없이 외면하는 분위기를 조성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
스타 판을 운영하는 방식을 개선해야 한다. 지금처럼 일대일로 실력을 겨루는 스포츠 종목을 팀 단위 리그로 운영할 이유가 없다. 스타크래프트는 개인경기인 프로 테니스나 골프처럼 경기를 운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지금 프로게임단 운영하는 회사들이나 스폰서로 돈을 대는 회사들은 그 1년 운영비만큼을 상금으로 걸고 자기 이름을 단 토너먼트를 개최하면 된다. 1월에는 SKT컵, 2월에는 KT컵, 3월에는 STX컵, 4월엔 온게임넷 스타리그, 5월엔 CJ컵, 6월엔 신한은행컵 7월엔 다음컵...이런 식으로. 프로 테니스에서 하는 식으로, 상금은 1위에 몰아주는 게 아니라 64강 진출자부터 우승자까지 차등적으로 배정하면 될 것이다. 팀은 해체하고, 각 선수는 스스로 토너먼트 참가 여부를 결정해서 실력을 겨루고, 연습도 혼자서 각자 알아서 하고. 최연성 같은 은퇴한 선수들을 현역 선수들이 트레이너로 고용하게 되겠지. 협회는 일정한 자격요건을 정해서 프로게이머 자격을 부여하고 그 자격이 있는 사람이 각 토너먼트에 참가할 수 있게끔 하면 된다.
이런 식으로 하면 각 게임단은 어차피 지금 프로게임단 운영비로 나가는 돈만큼만 쓰면 되니 지금보다 손해볼 일이 없고, 자기 이름 건 대회에서 자기 마음대로 회사 홍보하면 될 테니 광고효과도 비슷하게 얻을 수 있다. 무엇보다 토너먼트 형식이야말로 일대일로 승부를 내는 스타크래프트에 적합하기 때문에 관객 입장에서도 훨씬 흥미진진하고 재미있게 즐길 수 있을 것이고, 스타 판의 전체적인 인기도 올라가지 않을까. 선수들도 지금같이 팀 숙소에서 합숙하며 꽃다운 인생의 전부를 반강제적으로 훈련에만 바쳐야 하는 비인간적인 상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고. 지금같은 프로리그와 프로게임단 체제는 스타크래프트라는 종목의 성격과는 전혀 맞지 않는다.
이런 건 케스파에서 논의해서 실행해야 할 일인데, 당췌 케스파는 인적구성이 어떻게 되고 어떤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는지 알 수가 없다. 축구협회나 농구협회처럼 갈곳 없는 정치인들이 낙하산으로 한 자리씩 꿰차는 것인지. 누가 나 좀 케스파에 취직 안시켜주나...
- 올해의 명언 : 잡스의 스탠퍼드대 연설
사실 이건 예전에 영상으로 접했었지만, 올해 잡스가 죽은 걸 계기로 몇 번 다시 보았다.
새겨들을 말이 많다. Don't settle. Keep looking.
아마 써 놓고 나면 상 줄 것들이 더 떠오르겠지만, 일단은 여기까지.
내년에 제3회 시상식 때 다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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